
충격 !!
조작방송 KBS 윤인구는 대한민국 최고의 매국노 집안 !!!!!!!!!!!!!!
COREA 를 망하게 한 최고의 매국노 집안
윤웅렬 = 명성황후 시해사건에 연루된 인물
윤치호 = 일제 침략기 최고의 악질 친일파 매국노
윤덕영 = 고종 독살 사건의 주범
윤택영 = 고종 독살 사건의 주범
윤인구의 조상들은 조상 대대로 이어지는 최고 친일 민족 반역자 매국노의 집안으로 그 힘과 권력과 돈으로 윤보선이 나왔고 그 힘과 권력과 돈과 빽으로 윤인구는 친일 매국노 방송 KBS의 아나운서로 살고 있고 그 힘으로 결국 2008년 KBS 제야의 종 타종 방송 왜곡에 앞장섰다.
민족반역자와 반성하지 않는 후손들을 죽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
자칭 아나운서인 윤인구와 자칭 음악인 대머리 드러머 남궁연은 조선왕조와 대한제국을 망하게 한 최고의 악질 집안의 후손으로서 아직도 조상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2009년 오늘도 그들과 조상의 반역 매국노 행위를 자랑스러워 하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 COREA 단군조상의 후손들은 이들을 반드시! 반드시!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나라와 우리들과 후손들이 잘 사는 길이다!!
공공의 적은 지구밖으로 !!!
공동체를 파괴하는 쥐새끼 명바기 부류와 매국노들은 반드시 처단해야 한다 !!
아래 본문 중에서..
그러나 송촌 지석영(池錫永)이 윤웅렬(尹雄烈)에게 그를 추천하면서 ‘무위영(武衛營) 집사(執事) 우범선은 구세군교가(九世軍校家)에 병학(兵學)이 한숙(숙달됨)한 인물’이라고 평한 걸로 봐 무술에 능했음은 분명하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주동인물은 우장춘 박사의 부친인 우범선 | 대한제국시대
사회자: 윤인구
할아버지 윤웅열(명성황후 시해사건 연루),
윤보선(우리나라 대통령 역임)
윤덕영-윤택영(고종황제 독살에 가담)
인터넷 검색하면 다 나옵니다.
지난 90년 일본인 여류저술가 쓰노다 후사코(角田房子·98년 당시 84세)씨는 <わが祖國(나의 조국)>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언뜻 책 제목만 보면 본인의 자서전 같다. 그러나 부제를 보면 남의 이야기를 쓴 책임을 알 수 있다. 부제는 ‘우 박사(禹博士)의 운명의 씨앗(種)’.
▲ "을미사변" 후 일본 망명시절 우범선 일가의 모습. 가운데 어린이는 나중에 육종학자로 이름을 날린 우장춘 박사이며, 오른쪽은 우범선의 일본인 아내 사카이 나카.
그러면 여기서 한국인의 성(姓)을 가진 ‘우 박사’는 누구인가? 흔히 ‘씨 없는 수박’을 개발한 주인공으로 유명한 육종학자 우장춘(禹長春. 1898∼1959년) 박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 쓰노다 여사가 우 박사의 이야기를 책으로 쓴 데는 남다른 인연이 있다.
1914년 도쿄에서 태어난 쓰노다 여사는 1960년대부터 집필활동을 시작한 이후 한동안 일본군인들의 전기(傳記)를 주로 집필하였다. 그러다가 80년대 들어서부터 한일관계사 분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는데 그 첫 작품이 87년에 출간된 <민비암살(閔妃暗殺)>이다.
쓰노다 여사는 자료수집차 85년 한국을 방문했는데 우연한 기회에 한 한국인 학생으로부터 명성황후(민비) 암살에 가담한 조선군 대대장 우범선(禹範善)이 우장춘 박사의 부친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쓰노다 여사로서는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우 박사는 일본에서도 유명한 육종학자였던데다 그동안 그런 이야기를 전혀 들어본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쓰노다 여사는 이후 3년간 한일 양국을 오가면서 우 박사의 흔적을 뒤지고 우 박사 유족들을 만나서 증언을 들었다. <나의 조국>은 이런 인연에서 탄생한 우 박사 집안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다.
후사코 여사의 "나의 조국"과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1895년(을미 년) 10월 8일 새벽 5시30분경. 채 어둠이 가시지도 않은 미명에 정체불명의 한 무리가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앞에 들이닥쳤다. 일본군과 일본인 복장을 한 이 괴한들은 궁궐을 수비하고 있던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洪啓薰) 일행을 살해하고는 곧바로 근정전을 지나 건천궁(乾淸宮)으로 쳐들어갔다.
이들은 국왕(고종)의 침전인 곤령전에 난입,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국왕은 옷이 찢겨지는 등 수모를 당하였다. 또 왕세자는 일본군 장교복장을 한 폭도에게 상투를 잡힌 채 그가 휘두른 칼에 목을 맞고 쓰러졌으나 다행히 칼등을 맞아 목숨을 건졌다.
이들 중 한 무리는 인근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로 내달렸다. 궁내부 대신 이경직(李景稙)이 길을 막고 나서자 폭도들은 이경직을 총으로 사살하고는 고종이 보는 앞에서 다시 칼로 무참히 베었다. 이어 왕비 침전에서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르고 울려퍼졌다.
궁녀 3명과 왕비(민비, 시해사건 발발 2년 뒤인 1897년 명성황후로 추존됨)의 비명소리였다. 폭도들은 궁녀와 왕세자 이척(李拓. 순종의 본명)을 통해 피살된 자 중의 한 사람이 왕비임을 확인하고는 왕비의 시신를 홑이불에 싸서 인근 녹원(鹿園) 솔밭에서 석유불에 태워버렸다.
여기서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지 않은 비화 한 토막을 소개하면, 폭도들은 당시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그 시신을 능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는 사실이다.
시간(屍姦)도 서슴치 않은 일본 낭인 무리들
▲ "국왕무사 왕비살해".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당일 사건 발생 4시간 후인 오전 9시 20분 주한 일본공사 수비대 소속 니이로 해군소좌가 일본 육군참모부에 보고한 "극비" 전문.
일본인 사학자 야마베 겐타로(山邊健太郞·77년 작고)는 당시 구한국 정부의 고문으로 있던 이시즈카(石塚英藏)가 사건 직후 본국으로 보낸 보고서 내용(‘…왕비를 끌어내 2∼3 군데 도상(刀傷)을 입히고 또한 발가벗겨 국부검사(局部檢査)를 했다…’)를 인용, “폭도들이 사체(死體)를 능욕했다”(<日本の韓國倂合>. 1966년 출간)고 폭로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최문형(崔文衡. 한양대·사학과) 교수는 “시체에 대한 국부검사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며 ‘능욕’이란 표현도 적당치 않다”며 “왕궁 침입에 앞서 이미 술에 만취한 자들이 시간(屍姦, 시체 강간)도 서슴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고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일국의 왕비가 괴한 무리들에게 살해당하고 또 그 시신이 능욕을 당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진상이다.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으로 ‘을미사변’은 비참하고 치욕적인 사건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이 치욕스런 사건에 음모 단계에서부터 가담한 조선인이 한 명 있었다. 바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부친 우범선(禹範善. 1857∼1903년)이었다. 당시 훈련대 제2대대장으로 있던 우범선은 주한일본공사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에게 포섭돼 이 사건에 발을 들여놓게 됐다.
이 사건에서 그가 맡은 임무는 훈련대 병력동원. 당초 임무대로 그는 상황이 전개되자 훈련대 제2대대 병력을 차질없이 동원한 것은 물론이고 명성황후의 시신 ‘처리’도 그가 맡았다. 폭도들에 의해 시해된 후 불태워진 명성황후의 시신은 타고 남은 재는 궁궐 내 우물에 버려졌고 유해 일부는 우범선의 지시로 휘하의 윤석우(尹錫禹)가 땅에 묻어버렸다. 증거인멸을 위해서였다.
우범선 지시로 명성황후 유해 일부 땅에 묻어
우범선은 어떤 인물인가? 대한제국기에 군인으로 활동한 것은 분명하나 <대한제국관원이력서>나 <구한국 관보(官報)> 등 공식자료에는 그의 출신·경력사항이 전혀 나와 있지 않다. 야사(野史) 몇 군데서 일부 확인될 뿐이다.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라는 책에 따르면 우범선이 (별기군의) 참령관(參領官)으로 근무할 당시 생도들이 그를 ‘자네’라고 불러 그가 반발했던 사실로 봐 출신성분은 그리 대단치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나 송촌 지석영(池錫永)이 윤웅열(尹雄烈)에게 그를 추천하면서 ‘무위영(武衛營) 집사(執事) 우범선은 구세군교가(九世軍校家)에 병학(兵學)이 한숙(숙달됨)한 인물’이라고 평한 걸로 봐 무술에 능했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우범선은 무인(武人)집안 출신으로 20세가 되던 해(1876년)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지방에서 근무하다가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자 여기에 참여했다. 별기군은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의 건의로 1881년 한국군의 군제(軍制)개혁의 일환으로 창설되었는데 그가 친일로 나선 첫 실마리는 이로부터 시작된다.
여기서 그는 친일 개화세력들과 교류하면서 개화정책에 눈을 떠 개화파에 가담하였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입, 민씨 정권을 몰아내자 그는 개화파들의 천거로 군국기무처 의원이 돼 갑오(甲午)개혁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4월 친일정권에 의해 훈련대가 창설되자 그는 제2대대장에 보임됐다. 훈련대는 나중에 일제의 친일세력 확장의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한편 이 무렵 명성황후는 러시아와 손잡고 친일세력 축출을 기도하고 있어 친일세력으로선 궁지에 몰린 입장이었다. 일본은 국면전환을 위해 공사를 이노우에(井上馨)에서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로 교체하였다. 미우라는 부임직후 ‘여우사냥’ 운운하면서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세우고는 당시 한국에서 암약하던 일본인 낭인(浪人)패거리들을 끌어모았다.
아들 우장춘 남기고 자객에게 비명횡사 당해
▲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피살된 현장인 경복궁 내 옥호루의 모습.(1900년대 초 촬영) 지금 옥호루는 헐리고 없고, 대신 그 자리에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기념각이 서 있다.
낭인 가운데는 친일신문 <한성신보(漢城新報)> 사장 아다치 겐조(安達謙藏)와 시바 시로오(柴四郞) 등 일본의 대표적 명문대 출신의 지성인들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이들 중 더러는 나중에 각료·중의원 의원 등을 지냈다) 미우라는 이들 외에 조선인 협력자를 물색하던 중 평소 친일성향을 가진데다 당시 민씨정권의 훈련대 해산계획에 불만을 품고있던 우범선을 포섭하는데 성공하였다.
우범선은 미우라에게 “조선의 정치개선은 당우(黨羽)를 일소하지 않으면 어렵다”며 민비(명성황후)시해를 통한 친일정권 수립을 역설하였다.
이어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李斗璜. 나중에 중추원 부찬의·전북 도장관 역임), 제3대대장 이진호(李軫鎬. 나중에 총독부 학무국장·중추원고문 역임) 등이 속속 포섭되자 미우라는 당초 계획날짜를 이틀 앞당겨 거사(?)를 결행하였다. 결국 ‘을미사변’은 일본 공사관의 주도 아래 일본인 낭인 무리와 조선인 친일군인들이 만들어낸 ‘합작품’인 셈이다.
사건 후 우범선은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도쿄에서 망명생활 도중 사카이(酒井ナカ)라는 일본인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한 그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1903년 구레시(吳市)로 거처를 옮겼다가 그 해말 자객 고영근(高永根)에게 암살당하였다.
그의 비명횡사는 일본으로 도망갈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현재 그의 묘는 그가 살해된 구레시와 도쿄 두 군데 있다. 도쿄 아오야마(靑山) 묘지에 있는 묘는 일본인 후원자가 유골을 분골(分骨)하여 그의 사후 1년 뒤인 1904년에 만든 것이다.
우범선에게는 우장춘 이외에 유복자 아들이 하나 더 있었다. 차남은 명문 제1고등학교·동경(東京)제국대학 법과를 졸업, 일본 유수의 회사에서 중역으로 근무하다가 지금은 은퇴하였다. 그는 모계(母系) 집안에 입적돼 호적상으로는 완전한 일본인이 되었다.
반면 우 박사는 6·25 와중에 귀국, 일생을 조국의 농업발달을 위해 연구에 전념했다. 우 박사로서는 그 길이 아버지의 과오를 속죄하는 길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
신동아닷컴 42.11월호 | 이종각(전 동아일보 기자 · 일본 주오대학 겸임강사)
우범선, 많은 사람이 그가 누군지 모른다. ‘씨 없는 수박’으로 유명한 우장춘 박사의 아버지라고 설명하면 “그러냐?”며 놀라는
정도다. 그러나 그는 근현대사에서 절대 잊혀선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우범선은 1895년 10월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미사변) 당시 일본이 경복궁에 데리고 들어갔던 조선훈련대의 제2대대장이었다. 1857년생인 우범선은 을미사변 직후인 1896년 1월 서울에 처자를 남겨둔 채 일본으로 망명해 사카이 나카라는 일본 여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우범선은 망명 7년째 되던 1903년 11월24일, 히로시마현 구레시에서 한국에서 온 자객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다.
우범선을 살해한 자객은 고영근이었다. 그는 우범선을 살해한 직후 일본 경찰에 자수했고 ‘국모시해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고 살해 이유를 밝혔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은 아직 배후와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다. 그런 점에서 우범선 살해사건의 전모를 밝히는 것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진상에 접근하는 한 단서가 될지도 모른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상세한 내용은 필자의 저서 ‘자객 고영근의 명성황후 복수기’ 참조, 동아일보사, 2009년)
-‘여우사냥’-
을미사변 당시 국내외 정세는 매우 복잡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기세가 충천했지만 곧바로 삼국간섭(러시아, 프랑스, 독일이 청일전쟁 당시 일본이 얻어낸 랴오둥(遼東)반도를 청에 다시 돌려주라고 압력)이란 암초에 부딪혔다. 러시아와 전쟁을 할 형편이 못됐던 일본은 굴복했다. 일본의 세력이 약화되자 조선 왕실은 내각에서 친일파를 면직시키고 민씨 일파와 친러파 등을 대거 기용했다. 정세가 불리해지자 일본 정부는 주한공사에 육군 중장 출신인 미우라 고로를 임명했고 이때부터 명성황후 시해 공작(작전명 ‘여우사냥’)을 준비했다. 미우라는 조선에서 일한 지 7년째인 서기관 스기무라 후카시에게 이 일을 맡겼다.
훈련대 제2대대장이었던 우범선은 을미사변 11일 전인 9월27일, 일본군 수비대 미야모토 다케타로 소위에게 훈련대 해산과 관련된 정보를 알려줬다. ‘훈련대 해산’ 소식은 당시 일본엔 중요한 정보였다.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은 미우라 공사가 그 일에 우범선이 이끄는 제2대대를 앞장세울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거사 이전에 훈련대가 해산돼버리면 미우라가 계획한 훈련대 동원은 수포로 돌아가고 ‘여우사냥’은 결정적인 차질을 빚을 수 있었다. 미우라는 당초 계획(10월10일)을 앞당기기로 결심했다. 미우라 공사는 10월1일 한성신보사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휘하 낭인들을 ‘여우사냥’의 전위대로 동원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낭인들 보수로 6000엔을 제시했다.
-우범선의 결정적 제보-
이런 일본 측 흉계를 눈치 채지 못한 왕실은 훈련대 해산을 서둘렀다. 훈련대 해산을 결정한 10월7일 오전 9시, 군부대신 안경수는 일본 공사관을 방문해 10월8일 무장해제를 정식으로 통고했다. 이때 우범선은 공사관으로 찾아와 미우라 공사와 ‘긴밀한 얘기’를 나누면서 ‘거사’ 동참을 흔쾌히 약속했다. 미우라는 오후 4시경부터 거사에 가담할 일본 경찰과 주요 민간인들을 공사관으로 불러 동원 태세를 최종 점검, 8일 미명 대원군을 앞세워 입궐한다는 명령을 하달했다. 이날 밤 우범선은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에겐 보고하지 않은 채 야간훈련을 한다며 병사들에게 실탄까지 휴대시켜 출동했다.
10월8일 새벽, 일본의 군인, 경찰, 공사관원에다 낭인들, 조선군 훈련대로 구성된 기괴한 다국적 혼성부대는 현재의 서대문경찰서 앞에 집합해 정동을 거쳐 광화문으로 향했다. 대원군이 탄 가마를 한가운데 두고 아다치가 지휘하는 낭인 50여 명이 일본 경찰 10여 명과 함께 선두에 서고, 그 뒤를 일본군 수비대가, 수비대 뒤를 우범선이 이끄는 조선군 훈련대가 따르고, 대원군 가마 좌우는 낭인별동대가 호위했다. 대원군 가마 바로 뒤에는 다시 일본군 수비대 1개 대대가 따랐다. 맨 뒤에는 이두황이 인솔하는 훈련대 제1대대가 배치되었다.
이보다 앞서 선발대로 뽑힌 일본 경찰이 긴 사다리를 광화문 옆 담벼락에 걸어 담을 타고 넘어 들어갔다. 광화문을 경비하던 조선 순검과 병사들은 아무런 대항조차 하지 않은 채 놀라 도망쳤다. 경복궁의 정문이 활짝 열렸다. 이들은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진입했다. 오전 5시50분경이었다.
그렇다면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당일 과연 어떤 역할을 했을까?
일본의 우익단체 ‘흑룡회(黑龍會)’가 1933년에 편찬한 ‘동아선각지사기전’엔 우범선이 명성황후의 사체를 버리라고 지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일본 사노시 향토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스기무라 군일기’에도 우범선이 명성황후 사체를 소각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범선이 곤녕전에 도착하니 명성황후는 이미 칼에 베여 마루에 쓰러진 채로 후후 숨을 쉬고 있었다. 장사들은 사진을 보며 왕비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왕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조금 있다가 절명했다. 우범선은 구연수와 하사관에게 명해 왕비의 사체를 이불 위에 얹고 그 위에 다시 이불을 덮어 새끼줄로 묶어 옆 창고에 넣었다. 곧 사체를 동산 기슭으로 옮겨 석유를 끼얹어 태웠다. 타다 남은 뼈는 하사관이 못에 갖다 버렸다.”
그 노트가 쓰이기 약 30년 전인 1903년 11월 우범선을 살해한 고영근이 자수할 때 소지했던 ‘한국 정부 앞으로 보내는 서한’에도 우범선에 대해
‘시국모소체지극역대악(弑國母燒體之極逆大惡, 국모를 시해하고 그 몸을 소각한 극역 대악)’이라고 되어 있어 우범선이 사체를 소각했다는 사실은 당시 일반인에게도 널리 펴져 있었음을 말해준다.
-죽어야 하는 운명-
1857년 서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우범선은 당시 일본 교관이 지도하는 별기군의 간부로 일하던 중 극심한 모멸을 당하자 사직한다. 이같은 굴욕이 민씨 일파 등 수구세력에 대한 불만과 저항심을 품는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당시 우범선에게는 처와 딸 둘이 있었다. 그는 훈련대 해산이 결정되자 훈련대 제1대대장 이두황 등과 함께 부산으로 내려갔고 1896년 1월 일본으로 망명한다.‘요시찰한국인거동(要視察韓國人擧動)’ 자료에 따르면 우범선의 망명 뒤 행적은 미우라 등 명성황후 시해사건 관련 일본인사들과 유대관계를 계속 이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우범선은 도쿄의 혼고에 살고 있을 때 주인집 하녀인 사카이 나카라는 열다섯 살 어린 일본 여성과 결혼했다. 미우라는 나카의 중매인이 우범선의 인품에 대해 묻자 “좋은 친구이지만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사내야. 이 점을 감안해서 중매를 서주게”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미우라는 우범선이 조선에서 온 자객에게 언제 당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898년 4월 장남 장춘이 태어난 후, 우범선은 1898년 11월 가족을 데리고 처의 언니 부부가 사는 히로시마현 구레시 와쇼마치로 이사했다.
-고영근의 복수-
1854년생인 고영근은 상민 출신으로 민씨가(家)의 실력자였던 민영익가의 청지기, 즉 시중꾼으로 궁중을 출입하면서 명성황후의 총애를 받아
종2품직인 경상좌도병마절도사까지 올랐다. 1903년 10월28일, 고영근이 구레시에 있는 우범선의 집에 나타났다. 고영근은 자신이 결코 자객이 아님을 열심히 설명했고 우범선이 어느 정도 경계심을 풀자 자신도 구레에 살고 싶으니 방을 얻어달라고 부탁했다. 마음이 풀어진 우범선은 고영근을 자신의 집에 사흘간 기숙시키며 살집을 알아봐 주기도 했다. 그 사이 고영근은 은밀히 오카야마에 있는 노윤명에게 연락했고 11월13일 노윤명이 구레에 도착했다.
1903년 11월24일 저녁 6시경, 고영근과 노윤명 그리고 우범선은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새로 구할 방을 결정하고 집주인과 계약을 마친 것을 이유로 고영근이 우범선에게 저녁을 대접하겠다고 제안해 만들어진 자리였다. 한 시간쯤 경과한 뒤 고영근이 슬며시 일어나 품속에 숨겨둔 단도를 꺼내 우범선의 오른쪽 목을 찌르고 몸으로 우범선을 덮쳐 턱과 목 등을 수차례 더 찔렀다. 그 순간 노윤명이 준비해두었던 쇠망치로 우범선의 머리를 난타했다. 우범선은 즉사했다. 당시 우범선의 나이는 47세, 명성황후시해사건 이후 만 8년1개월, 일본으로 망명한 지 7년 10개월 되던 시점이었다. 고영근은 49세였고 노윤명은 30세였다. 둘은 우범선을 살해한 뒤 곧바로 인근 와쇼마치파출소로 찾아가 자수했다. 고영근은 조사과정에서 “우범선은 왕비를 살해한 극악무도한 자이므로 한국의 신하로서 그대로 있을 수 없어 죽였다”고 진술했다. 다음날인 11월25일, 우범선의 처 나카는 집으로 찾아온 신문기자들에게 “우범선이 평소 자객에 대해 상당히 조심했으나 결국 고영근에게 당한 것은 우범선의 운이 다한 것이다. 고영근의 계략에 당하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고종, 이토에 고영근을 부탁-
히로시마 감옥으로 이송된 고영근 등에 대한 재판은 신속히 진행됐다. 12월24일 히로시마지방재판소에서 열린 공판에서 고영근은 이렇게 주장했다.
“예심결정서를 읽어본즉, 그대로 해도 좋으나, 단지 ‘모살죄’라고 하는 것은 유감이다. ‘적괴참살복국모수(賊魁斬殺復國母讐·적괴를 참살하여 국모의 원수를 갚는다)’의 여덟 자를 넣어야만 본뜻이 되며, 또 노윤명을 공모자라고 그러는데 그는 전적으로 종범으로 단지 방조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시 변호인들은 고영근, 노윤명을 의사(義士)라고 주장했고 일본에서도 충신효자의 모살죄는 경감해주는 판례가 있다며 형량 경감을 주장했다. 우범선 살해 소식이 알려진 뒤 서울에선 고영근의 죄를 사면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고종은 직접 하야시 곤스케 주한 일본공사를 불러 고영근의 선처를 부탁했다. 그해 12월26일, 고영근과 노윤명은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이와 관련해 고무라 외상은 다음날
하야시 공사에게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
“양인은 다분히 상소할 것으로 보이나 만약 사형으로 확정된다면 한국에 대한 호의의 표시로 특사를 (천황에게) 상주하여 한 등급을 감형하여, 목숨을 건지게 하는 것을 고려 중이므로 그 뜻을 (한국) 황제폐하에게 내밀히 상주해주기 바란다.”
고영근의 감형을 외교카드로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다음해인 1904년 2월4일, 히로시마 항소원(고등법원) 제2심 재판에서 고영근은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노윤명은 무기징역에서 징역12년으로 각각 감형되었다. 고종은 그해 3월 이토 히로부미가 특사로 방한하자 고영근의 한국 송환을 특별히 부탁했다.
-‘씨 없는 수박’은 허구?-
우범선이 고영근에게 살해됐을 때 우범선의 일본인 처 나카는 임신 중이었다. 우범선이 살해된 다음해(1904년) 봄, 나카는 유복자인 사내아이를 낳았다. 우범선은 장남인 장춘에게는 ‘우’란 조선 성을 붙여주었으나, 나카는 남편이 사망하고 난 뒤 태어난 차남을 자신의 먼 친척 M의 친자로 입적시켰고 성도 M으로 했다. 조선총독부는 우범선 사후 20여 년간, 그의 두 아들이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상당한 액수의 학비를 지급했고 일본인 처 나카에게도 지원금을 보냈다.
우장춘은 1950년 3월 한국으로 와 1959년 여름, 숨질 때까지 농업 발전에 기여했고 그 공로로 문화포장을 받았다. 대다수 한국인은 우장춘을 ‘씨없는 수박을 최초로 만든 세계적인 육종학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씨 없는 수박은 우장춘이 아니라, 일본 교토(京都)대학의 기하라 히토시 교수가 세계 최초로 만든 것이었다. 우장춘 박사가 씨 없는 수박을 시범 ‘재배’한 것이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로 잘못 전해진 것이다.
고종이 이토에게 고영근의 선처를 부탁한 것이 주효했는지 항소심에서 무기징역을 받았던 고영근은 감형되어 1909년(일자는 미상) 형기를 마치고 귀국했다. 고종 승하(1919년) 후 2년여가 지난 1921년, 고영근은 금곡리 홍릉을 지키는 능참봉에 임명됐는데 그는 여기서도 문제를 일으켰다. 고종 승하 후 4년 가까이 홍릉 한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황제 능비’를 닷새간 야밤에 인부들을 동원해 ‘高宗太皇帝’ 등 여덟 자를 더 새겨 넣은 뒤 비각 안에 세운 것이다. 난처해진 조선총독부가 일본내각의 궁내성과 협의한 끝에 다음해인 1923년 1월, 고영근이 세운 비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이는 3·1만세운동 직후 능비문제로 다시 조선인을 자극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참봉직에서 물러난 다음해 병으로 죽은 그의 마지막에 대해선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금곡 숲속에 초가집을 짓고, 무관(無冠)의 참봉으로 만년을 보냈는데, 병으로 죽자 뼈를 태왕(고종)의 능 밑에 묻었다.” (곤도 시로스케,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 초센신문사, 1925년)
고종과 명성황후가 합장된 그 발밑에 뼈를 묻었다는 고영근. 그는 이렇게 고종, 그리고 명성황후와 살아서는 물론이고 죽어서도 끈질긴 인연을 이어갔다.
본문출처 : http://www.bdjsa.x-y.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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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이 2012/02/07 11:40
진짜 윤인구 아나운서 보니까 겉모습봤을때는 괜찮아보이는데 알고보니 친일파후손에 부자집자제였다니 정말로 치가 떠네요? 게다가 그의 할아버지인 윤치영은 민족반역자인것도 모자라서 부인이 둘인가 셋인가 있는데 윤인구 아나운서의 부친의 생모는 이은혜여사가 아닌 다른여자라고 누가 그러던데요? 할아버지인 윤치영이 1898년생이고 윤인구 아나운서의 아버지가 1948년생이신데 만50세에 막내아들을 얻은거니 그러려니 할수있지만 법적인 친할머니인 이은혜여사가 윤인구 아나운서의 아버지를 만50세에 낳았다는건 이해할수가 없거든요? 제가 보기에는 위키피디아가 진짜 윤인구 아나운서의 조부의 가족사에 대해 잘못조사한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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